체스를 잘한다는 건, 대체 뭘 잘한다는 걸까
체스를 입문한지 2개월 정도 되었는데, 문득 든 의문이다.
퍼즐을 풀 때는 제법 체스를 잘하는 것 같다.
퀸을 희생하고, 나이트로 체크하고, 마지막에 룩으로 메이트. 이런 것도 찾아낸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비숍을 공짜로 준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비숍을.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퍼즐을 풀던 나와 대국하는 나는 같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른 체스를 두는 걸까.
체스 훈련 앱을 만들면서 관련 연구를 찾아보다 보니, 결국 이 질문까지 오게 됐다. 우리가 키우려는 ‘체스 실력’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일까?
체스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보통 “몇 수 앞까지 읽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열 수쯤 읽는다면 내가 못 이기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나는 세 수만 생각해도 원래 어디에 있던 기물인지 헷갈리니까.
그런데 연구자들은 조금 다른 질문도 했다.
고수는 체스판을 처음 보는 순간, 무엇을 알아보는 걸까?
1973년 카네기멜른대의 윌리엄 체이스와 허버트 사이먼은 실력이 다른 체스 선수들에게 판을 잠깐 보여주고, 기억나는 대로 기물을 다시 놓게 했다. 보여주는 시간은 고작 5초였다.
실제 대국에서 나온 미들게임 국면에서는 마스터가 평균 약 16개의 기물을 제자리에 놓았다. 초보자는 약 4개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고수의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은 것 같다.
그런데 기물을 무작위로 섞어 놓자(실제 게임에 나오지 않을만한 구조로), 그 격차가 크게 줄었다.
연구자들은 이 차이를 기물 사이의 관계에서 찾았다. 고수에게 익숙한 국면은 서로 공격하고, 지키고, 막고 있는 기물들의 구조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 묶음을 심리학에서는 ‘청크’라고 부른다.
체스를 조금 배운 사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킹과 폰과 룩을 따로 보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백랭크 메이트 조심해야겠네”가 한꺼번에 보인다. 킹의 탈출 칸이 막혀 있다는 사실과 상대 룩이 들어올 가능성을 매번 처음부터 따져볼 필요가 줄어든다.
그러면 체스 실력에는 계산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생기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어떤 수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에서부터.
물론 계산도 중요하다. 페르낭 고베가 선수 48명의 사고 과정을 살펴본 연구에서는 강한 선수들이 평균적으로 더 깊이 계산하는 차이도 나타났다.
그래서 흥미로운 질문은 “직관이냐 계산이냐”보다, 둘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느냐에 가깝다. 익숙한 패턴으로 중요한 후보를 찾고, 계산으로 그 수가 정말 되는지 확인하는 식이다.
이렇게 이어진다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좋은 패턴을 많이 익힌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한 번 더 꼬인다.
2008년 빌랄리치와 동료들은 체스 고수들에게 두 가지 해법이 있는 문제를 보여줬다. 하나는 익숙한 5수 메이트였고, 다른 하나는 덜 익숙한 3수 메이트였다.
익숙한 해법을 먼저 발견한 선수들은 더 짧은 해법을 놓치곤 했다.

(왼쪽 판에서 백의 가장 짧은 메이트를 찾아보자. 오른쪽은 흑 비숍의 위치만 바꿔 익숙한 해법을 막은 판이다. 기물 하나의 위치가 사람들이 다른 해법을 찾는 데 영향을 줬다.)
재미있는 부분은 시선 추적 결과다. 선수들은 다른 해법도 찾아봤다고 보고했지만, 눈은 계속 처음 떠올린 해법과 관련된 칸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수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미 마음에 든 수 주변을 계속 보고 있었던 것이다.
체스를 두면서 꽤 익숙한 상황이다.
희생이 하나 보인다. 멋있다. 성립했으면 좋겠다. 이제 계산의 목적이 그 희생을 성립시키는 쪽으로 조금씩 바뀐다.
상대가 이렇게 받아주면 되고, 그다음에도 이렇게 둬주면 된다. 문제는 상대가 그 정도로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보고 나니, 체스를 잘한다는 말에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좋은 아이디어를 빨리 떠올리는 능력에 더해, 마음에 든 아이디어라도 틀렸으면 버릴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여기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퍼즐에서는 보이던 수가 실전에서는 왜 안 보일까?"
생각해보면 전술 퍼즐에는 상당히 큰 힌트가 하나 있다.
“이 국면에는 찾아낼 만한 수가 있습니다.”
포크 문제를 골라 풀고 있다면 힌트가 더 붙는다. 포크를 찾으면 된다. 희생 문제라면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않을 수를 일단 의심해본다.
실전에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지금 전술이 있는지, 그냥 기물을 개선해야 하는지, 내 공격보다 상대의 위협을 먼저 막아야 하는지부터 판단해야 한다.
퍼즐에서는 ‘어떤 전술인가’를 찾았다면, 실전에서는 ‘지금 전술을 찾을 때인가’도 알아야 하는 셈이다.
이 차이를 생각하다 보니, 훈련에 대해서도 다른 질문이 생겼다.
최선수를 찾는 연습과 함께, 내가 실제로 둘 법한 나쁜 수를 알아보는 연습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이 폰을 잡으면 왜 안 될까?”
“내가 이 공격을 시작하면 상대는 무엇으로 반격할까?”
“이 두 수는 비슷해 보이는데, 어느 쪽이 기물을 공짜로 주게 될까?”
초·중급자에게는 멋진 수를 하나 더 발견하는 것만큼, 이런 실수를 두기 전에 알아차리는 변화도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의 퍼즐: 후보 수 비교, 상대 위협 찾기, 내 대국에서 나온 실수를 다시 보는 방식으로 관심이 넓어졌다. 어떤 훈련이 실제로 더 도움이 될지는 앞으로 알아보고 싶은 부분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재밌게 살펴본 연구 토픽들이 존재한다:
잘 배우고 있다는 느낌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코넬과 비요크의 그림 학습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여러 화가의 그림을 보여주고 화풍을 익히게 했다. 한 화가의 그림을 연달아 보여주기도 하고, 여러 화가의 그림을 섞어서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처음 보는 그림의 화가를 맞히게 하자, 섞어서 배운 쪽이 더 좋은 성적을 냈다.
그런데 많은 참가자는 한 화가씩 모아서 보는 방식이 더 잘 배워진다고 생각했다. 시험을 치른 뒤에도 그랬다.
이건 그림을 배우는 실험이지만, 체스 연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같은 종류의 메이트가 계속 나오면 점점 빨라지고, 정답도 잘 맞힌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문제 유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실전에서도 그 모양을 알아볼 수 있을까?
오늘 매끄럽게 풀었다는 경험과, 다음 대국에서 써먹을 수 있게 됐다는 변화 사이에는 확인할 것이 남아 있다.
그래서 요즘은 체스 실력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제한된 시간 안에 중요한 기물 관계를 알아보고, 살펴볼 만한 수를 고르고, 상대의 반박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처음 생각을 고치는 능력.
이렇게 보면 “무슨 수를 뒀는가”만큼 “왜 다른 수들을 두지 않았는가”도 궁금해진다. 고수의 멋진 한 수 뒤에는, 그 전에 버린 그럴듯한 수들이 있을 테니까.
내가 당장 얻고 싶은 변화도 조금 구체적이 됐다.
복기할 때는 잘 나온다.
“아, 이 수 두면 안 되는데.”
그 말을 기물을 놓기 전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본문의 링크에서 원문과 연구자들의 설명을 볼 수 있다. 체스판 기억과 청킹은 Chase & Simon(1973), 계산 과정은 Gobet(1998), 익숙한 해법에 붙잡히는 현상은 Bilalić 외(2008), 학습 방식과 주관적 느낌의 차이는 Kornell & Bjork(2008) 연구다.
댓글 8개
그림 A에 대한 추가 설명 작성했습니다!
왼쪽 판은 백 차례이며, 3수 메이트가 가능합니다: 1. Qe6+ Kh8 2. Qh6! Rd7 3. Qxh7#
핵심은 2.Qh6! 입니다. 퀸을 h6에 놓아도 g7폰은 b2비숍에 핀되어 퀸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Qxh7#을 막기 어렵습니다.
- 흑이 `2...Kg8`로 피하면 `3.Qxg7#`. - 첫 수에 `1...Kf8`로 피하면 `2.Nxh7#`.
실험에서 사람들이 먼저 발견한 익숙한 5수 메이트는 이쪽입니다.
1. Qe6+ Kh8 2. Nf7+ Kg8 3. Nh6+ Kh8 4. Qg8+ Rxg8 5. Nf7#
퀸을 희생하고 나이트로 끝내는 스머더드 메이트입니다. 이 패턴이 보이면 더 짧은 `Qh6!`를 놓치기 쉽습니다.
오른쪽 판에서는 흑 비숍이 h5에서 f7을 지켜 5수 해법이 막히지만, **3수 해법은 그대로 됩니다.** 논문 Figure 1 해설
오 근데 진짜 다른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같은 수 계속 보는거 좀 있는거 같음